처음엔 비싸고 성분 많은 게 당연히 좋은 줄 알았습니다.
에너지젤 하나 고르는데 BCAA니 타우린이니 아르기닌이니 성분표가 빼곡한 제품이 더 전문적으로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직접 달리면서 여러 제품을 써보고, 소비자원 조사 결과까지 살펴보고 나니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비쌀수록 쓸데없는 성분이 더 많이 들어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
실제로 달릴 때 몸이 쓸 수 있는 성분은 생각보다 훨씬 적습니다.
[핵심: 에네지젤 선택 기준]
당류 총량, 점도 낮은 제품, 불필요한 성분 유무

달리는 동안 몸이 실제로 흡수하는 성분
격렬한 유산소 운동 중에는 내장 기관으로 향하는 혈류량이 크게 줄어듭니다.
이를 위장관 허혈(Gastrointestinal Ischemia)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달리는 동안 소화기관이 거의 멈춘 상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혈액이 근육과 심장으로 집중되다 보니, 장이 영양소를 흡수할 여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알고 나면 에너지젤 성분표를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BCAA(분지사슬아미노산)는 근육 분해를 막고 회복을 돕는 성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운동 전후에 섭취하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달리는 도중에는 소화 흡수 자체가 이뤄지지 않으니 의미가 없고,
오히려 쓴맛 때문에 위를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타우린이나 아르기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르기닌은 혈관 확장 효과를 내려면 공복에 고용량을 섭취해야 하는데,
젤에 소량 들어있는 것으로는 달리는 중에 아무런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소비자원이 발표한 에너지젤 조사 보고서에서도
단백질 0.1g에서 5g, BCAA 233mg에서 1,476mg까지 제품마다 큰 차이가 있었는데,
이 수치들이 높다고 해서 러닝 퍼포먼스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출처: 한국소비자원).
그렇다면 달리는 중에 실제로 흡수되는 성분은 무엇일까요. 크게 세 가지입니다.
- 당류(포도당 또는 말토덱스트린): 즉각적인 에너지원으로 빠르게 혈당을 올려줍니다.
- 팔라티노스(Palatinose): 설탕과 구조가 비슷하지만 소화 속도가 느린 탄수화물로, 혈당을 완만하게 유지시켜 에너지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막아줍니다.
- 나트륨: 땀으로 빠져나간 전해질을 보충해 근육 경련을 예방합니다.
여기서 팔라티노스란 독일 쥐트추커(Südzucker) 사가 개발한 기능성 탄수화물로,
혈당지수(GI)가 일반 설탕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데 유리합니다.
당류와 팔라티노스의 합계가 20g에서 25g 사이인 제품이 40분에서 50분 간격으로 섭취했을 때
가장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카페인은 달리는 중에도 효과를 발휘하는 성분입니다.
카페인은 소화 흡수와는 별개 경로로 중추신경계(CNS, Central Nervous System)를 직접 자극합니다.
중추신경계란 뇌와 척수로 구성된 신경 중추로,
카페인이 여기에 작용하면 피로를 느끼는 아데노신 수용체를 차단해 각성 효과와 집중력 향상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후반 스퍼트가 필요한 시점에 카페인이 들어간 젤을 하나 더 챙기는 것은 꽤 유효한 전략입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30km 이후 극도로 지칠 때 카페인 젤 하나가 체감상 확실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점도와 불필요 성분, 실패에서 배운 것
어느날 생각을 해봤습니다.
에너지젤이나 당류나 비슷한 거 아닌가 싶어서,
하루는 대회 도중 에너지젤 대신 ABC 초콜릿을 7km 지점에서 꺼내 먹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원래도 입이 바짝 마르는 구간인데 초콜릿이 입안에 달라붙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이 쓰리기 시작했습니다.
겨우 완주하고 집에 돌아와 검색해보니 점도(Viscosity) 문제였습니다.
점도란 유체가 흐르는 데 저항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적 특성으로,
간단히 말해 얼마나 걸쭉하고 묽은가를 수치화한 것입니다.
초콜릿처럼 점도가 높은 음식은 위에서 묽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위벽을 자극합니다.
달리는 중에는 위장관 혈류가 이미 줄어든 상태라 이 부담이 배가되는 것입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운동 영양 관련 자료에서도 고점도 식품은 운동 중 소화 부담이 크다는 내용이 확인됩니다
(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나만의 에너지젤 선택법
에너지젤을 고를 때 제가 직접 기준으로 삼는 세 가지는 이렇습니다.
- 탄수화물 총량 20g~25g: 당류와 팔라티노스의 합이 이 범위 안에 있는지 확인합니다.
- 점도가 낮은 제품: 물처럼 흐르는 젤이 위장 부담이 적고 추운 날에도 굳지 않아 먹기 편합니다.
- 불필요 성분이 없는 제품: BCAA, 아미노산, 단백질, 비타민, 타우린, 아르기닌이 많이 들어간 제품일수록 가격은 높고 실제 효과는 달리는 중에 거의 없습니다.
고가 제품이 성분표가 화려한 건 사실인데,
그 성분들이 달리는 도중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결국 지갑만 얇아지는 셈입니다.
오히려 당류와 나트륨 중심으로 군더더기 없이 구성된 저렴한 제품이
러너에게 더 실용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러닝화로 치면 불필요한 기능 없이 쿠션과 반발력만 충실한 신발이 더 잘 달려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지막으로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젤이라도 물 없이 먹으면 안 됩니다.
고농도 탄수화물을 물 없이 섭취하면 삼투압(Osmotic Pressure) 현상이 일어납니다.
삼투압이란 농도 차이를 맞추기 위해 수분이 이동하는 현상으로,
젤을 물 없이 먹으면 장이 몸속 수분을 끌어당겨 복통이나 설사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젤 하나에 물 한 모금'은 선택이 아니라 공식입니다.
에너지젤 하나 고르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막상 레이스 후반에 위장이 말을 안 들으면 그 고통은 꽤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성분표에서 확인할 것은 딱 셋, 탄수화물 총량, 점도, 불필요 성분 유무입니다.
다음 대회를 준비 중이라면 지금 가진 젤의 성분표부터 한번 뒤집어 보시길 권합니다.
숫자 몇 개만 확인해도 선택이 훨씬 단순해집니다.
꼭! 저처럼 점도 높은 제품을 먹고 고생하지 않길 바랍니다.